[주제전] 우이신설 스토리 문학 - 박은선 작가 4~6
박은선
2018.07.01~2018.09.30

우이신설 스토리 - 문학

 
작가가 직접 시민을 만나고 대화하며 인근 지역 이야기를 수집해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 냅니다.
시민 개개인의 삶과 우이신설선이 만나 문학 작품화되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예술을 경험합니다.

박은선 작가


예쁘고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만,
하찮고 비루한 데서 발견한 한 문장은 빛나는 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벽이 아니라 문처럼 마주하길


<우이신설 도큐먼트> 노기훈 작가 사진 - 김효진
 

특별한 ‘문’을 찾고 있었다. 4·19 민주묘지역에서 내려 상점들을 따라 걸었다. 햇볕이 뜨거웠던 그날.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나와 손님들은 다른 공기 속에 있었다. 웃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는 그들은 오아시스 같았다.
헤매던 끝에 드디어 발견했다. 응용연극단체 문. 오늘 노크를 해야 하는 특별한 ‘문’이었다. 곧 소녀 같은 이미지의 김효진 대표님이 나와 반겨줬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널찍한 테이블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웃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무언가에 몰입하던 아까 그 손님들처럼.
 
“이곳에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오늘 인터뷰를 잠시 잊고 있었다던 대표님. 막상 질문을 드리니 준비한 것처럼 유창한 답변이 나온다. 특유의 긍정적인 기운이 큰 사무실을 온화하게 채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응용연극단체 문은 원래 성북동에 있었다고 한다. 수유동에서 예술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주하게 됐다고.
그러나 막상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아닐까?’ 고민을 많이 했다는 대표님. 생기 있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러다 인근 지역의, 배우자와 사별하신 60대 할머니들과 만나게 된 이야기를 전한다. 영숙 언니. 순덕 언니. 대표님은 할머니들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조금 들떠 말하던 대표님이야말로 언니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간 누구의 엄마나 동네 이름으로 불렸던 그들이기에 언니라고 불리는 걸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거 잘 못한다’면서도 고구마를 삶아오고, 당신 드시겠다며 싸오신 작은 떡까지 나눠먹으며 함께 했다고. 그건 집에만 있던 그들이 즐거움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방식이 아니었을까.
 
“놀 거리를 찾아주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말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한 번은 청년들과 모여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일도 전한다. 그런데 활동을 마치고 한 친구가 갑자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 친구가 말하길,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알게 됐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게 됐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사람으로, 예술가로 고민을 많이 했다는 대표님.
평소에도 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한다. ‘나를 잘 모른다’는 말은 결국 관계 속에서 나를 잘 모른다는 말이 아니냐고 묻는다. 대표님 나름대로 내린 정체성에 대한 해답은,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다양한 예술과 심리, 철학 등 다른 분야까지 더해져 만들어진 활동들은 결국 말하기 위한 거라고 한다.
 
“나누기 위해선 용기를 내야 해요.”
 
활동을 하면서 대표님은 먼저 나서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곳이 안전한 공간이라는 걸 인식하게 해줘야 한다며. 하지만 본인은 그런 안전한 공간이 없을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시작한 것이 요가라고. 아니나 다를까, 한쪽 구석에 아기자기한 매트와 쿠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요가를 하다 보면 내가 내 호흡 하나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표님은 깨닫는다고 한다. 호흡부터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요가의 큰 장점이라고. 덕분에 작업을 하면서 조급함을 느끼지 않게 됐다고 한다. 예전엔 시도하는 게 두려웠는데, 이젠 겁내지 않고 그냥 하게 되었다며.
강한 척을 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큰 용기라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때 나는 대표님의 마음 중 말랑말랑한 부분을 어루만지는 기분이었다. 또 그럴 수 있도록 대표님이 용기를 내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모두가 용기를 내고 이야기를 하다 갈 거라는 믿음도.
 
“열고 닫는 문을 뜻하기도 하고, 한자로 물을 문(問)을 뜻하기도 해요.”
 
문을 연다는 건 상징적으로 소통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정말 이곳은 이름처럼 인근 지역에 문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 같다는 의견을 건넸다. 그러자 대표님은 반가워하며 바로 그 의미라고 맞장구를 친다. 영재발굴단에 나온 아이를 보고 짓게 됐다는 단체의 이름 문.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그 아이가 신중한 고민 끝에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아이가 말하길, 문이라는 게 되게 재밌다? 영어로는 달을 뜻해. 달을 문처럼 열고 누나, 형들이 하늘에 잘 도착하면 좋겠다. 저 아이도 소통을 생각하고 작품을 만드는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는 대표님. 오늘 내가 열게 된 이 특별한 ‘문’은 그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프로그램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벽처럼 느끼고 있진 않은가 돌아봤다. 두드려 열 수 없는 게 벽이라면 나는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처음부터 열리지 않을 거라고 겁부터 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돌아봤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문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그렇듯 그 문들도 완벽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낀다. 때문에 생겨난 각자가 가진 나름의 틈.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극대화해서 생각하는 것은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내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던 대표님을 상상력이 뛰어나신 분이라 정리해본다.
 
이 글을 쓰며 스스로가 정한 규칙하나를 어겼다. 반복되는 말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던 것. 대표님은 ‘고민을 많이 했다’와 ‘싶었어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모두가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라고 느껴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고민을 많이 했다. 거울 속 나도, 눈앞의 타인도 벽이 아니라 ‘문’처럼 마주하길 바란다.



역사에 상상력이 더해지는 순간

매년 4월 18일이 되면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 나는 그 중 한명을 만났다. 고려대학교 졸업생 조은지 씨. 이는 총학생회에서 진행하는 큰 행사라고 한다. 마라톤 같은 건 아니지만 도로를 달려가기 때문에 동네에서도 워낙 큰 행사라며. 선배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묘지에 도착하면 참배한다고 한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인상적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과연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가능하다. 물리학자 정재승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고교시절 수학여행에서 이 말에 과학적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우리는 1년에 800만 번 숨을 쉰다고 한다. 들이마시는 숨을 다 합치면 2억 리터가 된다고. 이 공기가 지구 대류권에 흩어져 지난 400년간 균일하게 분포해 있다고 가정하면, 한 번이라도 이순신 장군의 입에 들어갔던 숨을 우리가 많이 들이마실 수 있다고 한다.
8.88km. 고려대학교 정문에서 국립4·19민주묘지까지의 거리다. 목적지를 향해 가며 그들은 얼마나 많은 호흡을 했을까. 지금의 후배들이나 과거의 선배들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다. 호흡이라는 단어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현재와 과거가 서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조화를 이루는 행사. 호흡하며 호흡을 맞추는 이 의미 있는 행사를 은지 씨는 더 각별하게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견고하고 오래된 느낌이 좋았어요.”
 
은지 씨는 학교와 인근 동네들의 첫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련된 여느 대학가들과 달리 시골동네 같은 느낌. 농담 삼아 자기들끼리는 안암촌, 안암골이라고도 부른다는 이곳을 은지 씨는 좋아한다고 한다. 우이신설선도 그렇지만 6호선도 아주 오래 되진 않았다고, 동네가 학교와 함께 서서히 발전하고 있다면서. 꼭 문명이라는 결과만이 발전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되레 묻는다.
답변이 예사롭지 않아 이것저것 묻다가 ‘역사’를 전공했다는 말에 무릎을 쳤다. 기본적으로 역사를 좋아했다는 은지 씨. 고등학교 때는 프랑스나 유럽의 왕실역사를 독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 문화적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본인은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곤 그 이야기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찾으려 애를 썼다고.
 
“다른 사람들이 소설 읽듯이 저는 사람을 읽었어요.”
 
한번은 영화를 보다가 결말을 보기 전 극장을 빠져나왔다는 은지 씨. 너무 슬퍼서 차마 더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단종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당시 은지 씨는 그와 비슷한 나이였다고. 자신은 꿈도 많고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여서 그 나이에 죽은 단종에게 더 감정 이입돼 가슴에 사무치게 아팠다고 한다. 소설은 가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역사는 실제니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며.
이런 은지 씨에게는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안타깝게도 없었다 한다. 엄마와 이모, 사촌 언니까지 미용사였기에 자연스럽게 기술을 배우려 했다고. 다행히 얼마 안 가 자신은 소질이 없다는 걸 알았고, 보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눌 수 있는 환경에 가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대학교에 입학해 역사학도가 되어 학보사까지 들어갔다는 은지 씨.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역사와 학보사의 공통점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것. 그러나 기자는 그런 사실을 적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이었다고 은지 씨는 정리한다. 더군다나 낯가리는 성격 때문에 전화공포증이 생길 정도였다며. 남을 설득하기 어려웠고 사실을 추구하면서는 더더욱 그랬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덕분에 자신이 사실만 추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는 은지 씨. 그간 나름의 상상력이 더해졌기에 역사도 좋아했던 것 같다고 한다.
또 그 상상력은 은지 씨를 오지로까지 떠나게 했다. 학보사 칼럼 중 익명으로 실린 실크로드 글. 사막을 걷는다는 내용이 유달리 오래 남았다는 은지 씨는 그 길로 베이징에 갔다고 한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을 꿰매야할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고. 근처에 있던 중국인들이 피 닦으라고 휴지를 건넬 정도였다는데, 듣기만 해도 심각한 그 상황을 은지 씨는 웃으며 설명한다.
팔다리 안 부러진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면서.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조언까지 들었지만 어쩐지 돌아가기 싫었다면서. 실로 몇몇 병원에 들렀으나 치료 받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베이징에 와있던 한국인 성형외과 의사를 만나 잘 치료 받았다고 한다. 그 우연이 아니었다면 당장 한국에 들어왔어야 될 상황. 나는 운이 좋았다는 말을 건넸다. 이어질 이야기 속 필연을 위한 운인 줄은 모른 채.
 
“그 안에서 느껴지는 시간 자체가 압도적이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마주한 사막을 지나 우즈베키스탄까지 건너갔다는 은지 씨.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천연자원을 얻거나 고속도로를 짓느라 파견 나온 한국인들을 만난 것이 그 시작. 그들은 오랜만에 보는 조국의 대학생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렇게 은지 씨는 현지 공사장까지 구경하게 됐고, 거기서 아버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1980년대 이라크에 계셨다가 걸프전으로 귀국하셨다는 은지 씨 아버지. 그는 그 시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인 시기인 것처럼 딸인 은지 씨에게 자주 전했다고. 내내 이야기로만 듣던 그 경험을 두 눈으로 바라보며, 또 아버지의 목소리를 내레이션처럼 더하며 은지 씨는 1980년대의 아버지를 상상했다고 한다. 그때 그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서.
1980년대의 아버지와 그날의 은지 씨도 호흡을 맞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김치가 떨어졌다면 진작 한국에 돌아와서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은지 씨. 이쯤 되니 역사는 과거의 시간이지만 은지 씨에게는 상상력으로 만든 또 다른 시간이라는 생각.
감탄할 수밖에 없는 건 그 모든 시간을 현재, 지금 이 시간과 더불어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은지 씨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시간.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 게 바로 문화가 아닐까. 서로 다른 시간들로 시차가 느껴질 땐 역사(歷史)뿐만 아니라 우이신설선의 역사(驛舍)에도 상상력이 더해지길 바란다.



We real cool

장난기 가득한 청년 셋을 만났다. 최윤. 이명원. 그리고 윤현준 씨.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이들은 출국을 앞둔 현준 씨를 위해 모였다고 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현준 씨. 올해 미국 어느 대학교에 합격한 그는 서울에서 딱 5년을 살았다고 했다. 겉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한국인인데, 더 손쉬운 듯 영어로 되뇔 때마다 그가 미국에서 자랐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이방인 같은 그가 바라본 한국, 또 정릉동은 어땠을까. 서둘러 물어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북한산 밑 한 아파트에 사는 현준 씨는 정(情)을 느꼈다고 했다. 정릉동은 진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라면서. 특히 아이들과 노인들이 여유롭게 놀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듯 세밀하게 묘사해줬다. 한번은 그들로부터 식사를 대접받았다는 이야기도 그쯤 나왔다. 배드민턴, 테니스를 하는 커뮤니티에 합류했다가 손자처럼 보살핌을 받았다는 내용.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인터뷰를 진행한 배드민턴장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간 몰랐던 한국의 이면을 정릉동에서 봤다고 현준 씨는 말했다. 미국에서 귀국해 맨 처음 방배동에 터를 잡았을 땐, 전해 듣기만 하던 전형적인 한국을 느꼈다고 했다. 속도 위주의 삶이랄까. 그 말만으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배동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무표정으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익숙하게 봐왔으니까. 함께 있던 윤, 명원 씨도 공감하는 듯 맞장구를 쳐주었다.
 
“행복해 보이는 이들을 관찰하면서 그냥 따라가게 되는 것 같아요.”
 
속도나 성과보다는 행복을 더 큰 가치관으로 생각한다는 현준 씨. 자신이 살던 두 동네의 상반된 풍경들. 그 중 어느 쪽 라이프스타일을 따라야하는지는 너무 쉬운 고민이 아니냐고 되레 묻는다. 어울려 지내는 것. 이는 현준 씨가 그냥 따라가게 된다는 행복의 비결이 아닐까. 복잡한 도심의 카페, 네 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의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이는 윤, 명원, 현준 씨가 함께 어울려 지낸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문득 현준 씨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고등학생으로 살았단 것에 호기심이 들었다. 듣자하니 현준 씨뿐만 아니라 윤, 명원 씨 모두 국제고등학교 출신. 그들의 말에 따르면 ‘다들 중학교 때 1등이었겠지’ 하는 생각이 당연하게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때문에 시험에서 100점 맞기가 정말 힘들고, 높은 등급 안 나온다고 우는 친구들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우리 안의 감정을 배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날 시험성적을 확인하고 우는 친구를 현준 씨는 안타깝게 바라봤다고 했다. 이번에 점수가 좀 안 나왔나보다 하면서. 하지만 알고 보니 겨우 한 문제 틀렸다는 친구. 아 이게 뭐지. 나도 울어야 하는 건가. 슬프지만 웃음이 나온다는 뜻의 ‘웃프다’는 요즘 말이 그날의 현준 씨에게 적절하게 느껴졌다. 워낙 열심히 하고 성적이 안 나오면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들이 많은 환경. 덕분에 현준 씨는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깨달았다고 했다.
다시 한 번 행복. 이후 영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매년 시낭송 대회를 열었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계속 공부를 해야 하니까 그나마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게 동아리 밖에 없는 생활. 더군다나 가정에서 떨어져 기숙사에서 살아가는 괴로움은 더더욱 표출되지 않는 것 같았다고. 혹시 가장 좋아하는 시가 있냐고 묻자 현준 씨는 ‘We real cool'이라는 제목을 적어줬다. 급하게 찾아보니 미국 시인 그웬돌린 브룩스의 시였다.
당구장에 간 7명의 친구들이 우린 ×× 쿨하다고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학교를 떠나고 늦게까지 숨어있고 죄를 노래하지만 곧 죽는다는 구절을 담았다. 실로 시인이 시카고의 한 길을 걷다가 우연히 어린 친구들 여럿이 당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썼다는 시. 현준 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 어린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속마음에는 아픔이 있을 것 같다는 것.
실제 낭송 대회에서는 시에 자주 반복되는 'We'를 일부러 짧고 빠르게 읽었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물으니, 그들이 진정 ‘우리’라는 게 있을까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그 말을 듣고 시를 다시 보자 7명이 함께한 말이 아니라 각자가 홀로 고독하게 읊조린 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상처 입은 청소년이 거들먹거리는 행동으로 그 상처를 외면화한다는, 언젠가 스치듯 들었던 의견도 떠올랐다.
 
“나도 내 스토리가 있고, 저들도 저들의 스토리가 있겠지!”
 
미소가 떠나지 않는 이 청년. 혹시나 싶어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물었다. 역시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딱히 푸는 방법이 없다는 현준 씨.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인근 공원에 올라 사람들을 살폈던 일을 전해줬다. 마치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봤던 것처럼, 무표정으로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 공원에서 보니 개미 크기였던 그들 나름의 스토리를 상상하고, ‘너무 슬퍼하지 말자’며 홀로 터덜터덜 내려왔다는 그의 모습이 흐뭇하게만 상상됐다.
결국 현준 씨를 행복하게 하는 건 상상력인 듯했다. 이 상상력 풍부한 청년에게 무심코 영화도 좋아하는지 물었다. 혼자 보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더라도 극장을 빠져나오며 같이 욕하고 그러면 재밌지 않느냐며. 갑자기 한 순간이 떠올랐다. 앞서 극장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이 나와 비슷한 감상을 늘어놔 가만히 듣고 있던 순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새삼 공감대라는 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스토리가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We real cool." 이라는 시가 현준 씨를 바탕으로 쓰인다면, 그 시가 낭송 대회에서 읽힌다면, 이 시를 낭송하게 될 이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결속력을 뜻하는 ‘We’를 아주 오랫동안 길게 낭송해야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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