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전] 우이신설 스토리 문학 - 이상우 작가 4~6
이상우
2018.07.01~2018.09.30

우이신설 스토리 - 문학

 
작가가 직접 시민을 만나고 대화하며 인근 지역 이야기를 수집해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 냅니다.
시민 개개인의 삶과 우이신설선이 만나 문학 작품화되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예술을 경험합니다.

이상우 작가


시를 통해 쓸 수 있는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
다만 쓸 수 있는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시란 마음을 하나의 형태로 빚고 있는 것,
다 빚어내는 것이 아닌 다만 꾸준히 빚고만 있는 것.
소원이자 기도인 시를 오래도록 쓰고 싶은 사람이다.



우이의 장소들 4. 회기로 골목을 따라 걷다 문득, 예술 보건소


‘누구에게나, 나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문화’ - 서울예술치유허브 성아라

   “누구에게나나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글짓기’”
 
   서울예술치유허브 입주 후 문학을 토대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는 성아라 작가. 아라 씨는 오랫동안 시를 썼고, 현재는 문학 상담을 중심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첫 질문으로 문학 상담을 한 계기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서 하는 글을 떠나 글을 통해 세상이 더 나아지는, 문학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기였다는 진중한 답변이 돌아왔다. 문학 상담을 하면서 조금씩 문학에 대한 생각이 변화했다고 한다. 어릴 땐, 문학이란 어떤 장인 의식을 두고 골방에서 혼자 열심히 파고드는 그런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고. 근데 문학 상담을 하면서 느낀 것은 어떤 장인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나를 만들어 가는 데 문학이라는 것이 중요할 수 있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만남과 만남의 순간마다 문학이란 게 가치를 발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라 씨는 문학 상담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를 들려주었다. 문학 창작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런데 생각 외로 큰 이야기보따리를 가진, 표현 욕구 정말 큰 사람들도 있다고. ‘이게 나’라고 마치 말하는 것처럼 쓰시는 분들을 만나는 순간. 그럴 때 문학으로 뭔가 한다는 위안을 받았다고 말이다.
 
   “‘연대’ 조금이라도 덜 폭력적으로 살기 위해서
 
   아라 씨에게 해결하고 싶은 고민이나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연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연대라는 것이 어떤 접점이나 공통점(필자가 예를 들자면 ‘여성’, ‘같이 사는 동네’ 등)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가능한데, 사실 사람은 복잡다단한 차이들을 가지고 있고 같은 위치, 비슷한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다 다른 낙차와 차이점들이 있다고. 또한 이러한 공통점조차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이들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요즘의 연대를 보면 어떤 고정된 기치 아래에서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이라고 구분하고 갈라놓는데 그러는 와중에 처음의 목적을 잃은 것 같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아주 처음에 서로 연대를 왜 했을까 고민해보면 “조금이라도 덜 폭력적으로 살기 위해서”였을 것인데 그 처음의 이유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아라 씨는 각자의 자리에서 거리를 유지하면서 연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말했다. 서로가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는 연대. 공통점이 아닌 다 다른 낙차와 차이를 존중하는 그런 연대.

   “도시락 집 – 거리가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은 친절

   아라 씨에게 서울예술치유허브 근처 지역의 느낌을 물어보자 ‘삭막함’이라는 생각 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도시 특유의 삭막함이 아니라 다른 것에 여유를 못 두는 생활의 삭막함 같은 것이 있다고. 그때 내가 떠올린 것은 나의 삭막함이었다. 글을 쓰고, 과제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내 대학생 시절. 대학가를 혼자 걷고 있으면 활기차고, 부지런하고, 명랑한 가운데 천천히 찾아오는 삭막함이 있었다. 고려대 인근에 위치한 서울예술치유허브. 아마 그런 삭막함이 아닐까 나는 짐작해보았다.
혹시라도 지역에서 소개해주고 싶은 공간이나 골목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부탁에 아라 씨는 의외로 고대 후문 앞쪽에 있는 ‘토마토 도시락’에 대한 기억을 말했다. 273버스를 타고 오가는 와중에 보이는 토마토 도시락.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무심하지만 이것저것을 챙겨주는 아주머니가 있다고. 편하게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오히려 좋은 친절.
 
 
   추신
 
   그날은 유래 없는 폭염이 이어지는 목요일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회기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저마다 어딘가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려대 후문 쪽의 여러 카페를 들여다보니 책상에 저마다 머리를 대고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보였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에서의 편지에서 여름에 대해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겨울은 추위에 맞서 사람들이 연대하게 되지만, 여름은 서로를 37도의 열 덩어리로 인식하게 만드는 힘든 계절이라고.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 불행을 더 슬픈 것으로 만든다고.
   신영복 선생의 여름만큼은 아니겠지만 대학가의 여름이라는 것은 내게 겨울보다 힘든 것으로 여겨진다. 방학인데도 굳이 학교 인근을 배회하며 공부를 하는 사람들. 나는 사람이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더위가 심해지면 주변을 둘러볼 여유는 점점 사라지고 어딘가로 그냥 빨리 도망가고 싶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살이 닿는 것이 불쾌해지는 것.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다.
   처음으로 방문한 서울예술치유허브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외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술 보건소’라고 적혀있는 문구였다. 보건소 건물이 이전한 자리에서 생긴 예술 보건소. 문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누구나 들어와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일층 카페. 무심하지만 친절히 반겨주는 예술치유허브의 사람들. 친절과 적당한 거리 속에서. 나는 만약 내가 이곳에서 프로그램을 참여한다면 꺼낼 수 있는 이야기보따리가 무엇이 있을까. 그것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우이의 장소들 5. 110번 종점. 매표소에서 돌아 나와 경국사 쪽으로

 
‘능말 스토리’ 홍선희 - 사람 길 가운데를 천천히 걸어 나가다
 
 “ ‘알뜰 매장’ 흥이 많은 동네 아줌마들과 첫 외식을 하다 ”

 
   처음 홍선희 선생님을 뵀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바로 ‘사람 복덕방’이라는 별명이었다. 선생님의 초대로 방문하게 된 ‘능말 스토리’ 모임. 정릉에 오래 거주한 마을 분들. 그 속에서 선생님은 정릉의 역사, 정릉의 여러 사람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해주셨다. 과연 ‘사람 복덕방’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며칠 후 다시 뵙고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 별명을 얻게 된 계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릉의 ‘알뜰매장’이 그 출발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2005년 서울문화재단에 입사 후 알뜰매장에서 정장을 자주 구입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만난 흥 많은 동네 아줌마들과 호프집에서 첫 외식을 했다고. 그전부터 오매불망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기를 꿈꿨는데 알뜰매장이란 공간을 통해 주민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만난 분의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는 문상을 가며 이제 진짜 사람 됐다는 느낌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런 여러 교류 속에서 바로 ‘사람 복덕방’이 출발됐다고.
 
   “능말 스토리의 시작, 오래 산 주민들의 친밀함 속에서”
 
   본래 홍선희 선생님은 전국 방방곳곳 지역이 가진 스토리에 관심이 많았다 한다. 그러던 중 2012년 여름 마을 잡지를 만들기 위해 다른 주민들과 함께 모인 것이 ‘능말 스토리’의 시작이었다고. 주말 저녁 서울숭덕초등학교 교정에서 건축학개론(주인공이 정릉에 거주하고 있다는 설정.)을 상영했고 오래된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하는 등 첫 잡지를 위해 스토리를 모았다 한다. 이후 매년 마을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고.
 
   선생님은 정릉의 주민들은 아주 친하다고 말씀하셨다. 서로 다 알고 지낸다고. 그러면서 몇 년 전 북한산에서 겪으신 사고 얘기도 해주셨다. 산에 올라가다가 낙상 사고를 겪었는데, 산장에서 만난 구조대의 대장이 바로 옆집 아저씨였다고. 하지만 새로 들어온 주민들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고. 선생님은 단독주택에 거주하는데, 새로 이사 온 주민들은 주로 다세대에 거주하고 있어 교류가 적다고 아쉬워 하셨다. 같은 골목 안에 ‘도전숙(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한 청년들이 거주하는 공공주택.)’ 같은 공간도 있지만 그 존재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고. 동네에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이사 가는 사람도 많아졌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홍선희 선생님의 얘기 속, 나는 사람 길 가운데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정릉에서 35년을 거주했다는 홍선희 선생님. 정릉의 역사와 여러 장소,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여수에서 태어난 길음시장 한복집 사장님. 1968년 북한무장공작원 남파사건이후 급히 만들어진 정릉의 스카이웨이. 숨어있는 목욕탕과 이발소.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논어 등의 강좌를 운영하신다는 80대의 유학자. 1940년대 말 일본 순사에게 화염병을 던지고, 늘 한복만 입고 다니신다는, 그 분이 사는 외환은행 골목의 서예학당. 45년 동안 통장을 맡은 이가 운영하는 동네구멍가게 ‘현대상회’. 동네에 상이 나면 자발적으로 함께 상복을 지어 입었다는 100년이 넘은 정릉2동의 노인정. 북한산보국문역 인근의 경국사. 2002월드컵 때 교회 벽에 스크린을 걸어놓고 경기를 틀어주었다는 정릉감리교회. 80넘은 분들이 그 교회의 사회복지관에 와 ‘스마트폰’ 사용법을 익힌다는 얘기. 아침마다 정릉에서 맷돌 체조를 한다는 사람들. 마을의 긴 역사와 그 속의 사람들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 얘기 가운데서, 마치 나는 사람으로 이어진 길 하나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110번 종점의 활성화, ‘흥청거림이 없어짐’”

   선생님께 가장 해결하고 싶은 숙제나, 문제 같은 것이 있으시냐고 물어보니 ‘110번의 종점의 활성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북한산매표소가 위치한 110번 종점. 옛날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시끄러울 정도였다고. 그러나 지금은 외지에서 놀러온 사람들도 북한산만 올라갔다 내려올 뿐 그곳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그저 통과하는 한 경로지가 된 느낌이라는 말씀. ‘흥청거림이 없어졌다’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머무를 수 있는 공간, 흥청거릴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110번 종점. 그리 되도록 젊은 예술가, 청년들이 많이 활동했으면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추신
 
   나는 직접 110번 종점을 찾아가 보았다. 북한산보국문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북한산국립공원 입구 정류장에서 내렸다. 평일이라 그런지 매표소로 올라가는 등산객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서 올라갔다. 산으로 가지는 않고 그 입구까지만 쫓아간 뒤 다시 되돌아 나왔다. 한적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풍경. ‘흥청거림’과는 조금 거리가 먼 풍경들. 잠시 걸어 내려와 경국사도 방문했다. 극락교에 멈춰 꽤 오랜 시간 동안 정릉천을 바라보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었던, 여러 사람의 이야기들이 물줄기처럼 흘러가는 걸 듣고 있었다.


우이의 장소들 6. 성북동에서 창경궁로까지, 문득 기억의 창고 문을 열고

 
“‘느낌가게’ 나비다 – 같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우이신설 도큐먼트> 노기훈 작가 사진 - 나비다

 

   “‘홍대 질렸어, 우이동 갈래’ 신혼의 시작, 아이의 탄생, 새로운 시작의 판타지.”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아티스트 나비다 님은 성북구에서 신혼을 시작했다고 한다. ‘홍대 질렸어, 우이동 갈래’라는 나비다 님의 말에 원래 성북에 거주하던 남편분이 우이동 인근 성북동을 투어 하자 권했다고. 그곳에서 신혼이 시작됐으며, 아이가 탄생했고, 그리고 ‘느낌가게’라는 새로운 출발이 활짝 열렸다고 한다.

   “느낌상자 : 나의 감정을 돌아보게 하고, 쓰게 함”
 
    처음 느낌가게가 시작된 계기에 대해 나비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도 줄곧 내면과 심리에 대한 작품에 몰입했는데 조금씩 대중과 괴리를 느끼게 됐다고. 그리고 더 편안하게 사람들과 예술을 통해 소통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가게의 벽면에는 차곡차곡 쌓인 상자들이 보였다. 상자마다 감정이나 느낌의 이름이 적혀있는 상자. 나비다 님은 가게를 오픈하면서 ‘느낌상자’ 정확히는 감정상자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느낌상자’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상자에는 이제까지 그 상자를 열어 본 사람들. 그들의 느낌, 감정들이 적힌 종이들이 쌓여있다. 그리고 이후 그 상자를 열어 본 다른 사람들이 그 상자 속에 모인 글들을 헤아리며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그것을 또 기록해서 넣는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여러 가지 기록들이 가게 가득 쌓였다고 했다. 성북동에서 처음 출발한 느낌가게에서부터, 창경궁로(혜화)로 옮긴 지금까지 ‘느낌상자’들이 쌓여있다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위로받고 싶어서 위로 상자를 열었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됐다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응원하고 싶어서 열었는데 스스로 응원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고. 나는 느낌가게 한 편에 진열된 상자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성북동에서 창경궁로까지 길게 이어진 감정의 역사를, 그 기억들을 헤아려보았다.
 
   “어느 날 사람들의 심리가 정말로 궁금해지다. ‘정말 속상할까?’”
 
   느낌가게를 시작하게 된 첫 번째 질문은 ‘정말 속상한가?’라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공연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심리, 마음건강을 테마로 여러 예술 활동을 하던 어느 날, 사람들의 감정이 막연히 어떨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짐작이 정말인지 궁금해졌다고. 그 후 동료들과 함께 직접 사람들에게 다가가 행복 점수 같은 것을 조사하기도 했고. 기타를 치는 동료는 사람들의 사연으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고. ‘이 댄스를 추면 건강해집니다’라는 문구로 같이 춤을 춘 적도 있다고. 그리고 막연히 짐작만 하던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조금씩 진짜 그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신뢰가 바탕이 되는, 같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사람들과 예술로 상담이나 소통을 할 때,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내면을 후벼 판 후 작품을 접하게 하면 훨씬 더 잘 닿게 된다고 나비다 님은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일반화되면 예술을 접하는 일도 일상화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의 물과 같다고 생각한다고. 근데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단단한 얼음, 고체일 때가 많은데 그러한 활동들은 마음을 액체, 물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고.’ 나비다 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런 액체가 되는 일을 반복하면 준비된 관객이라고 하는 것이 생기는 것 같다고. 예술 공부란 결국 준비된 마음, 어떤 녹은 마음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같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성북동, 길상사 가는 길. 그리고 옛 느낌가게 근처를 걸으며.”
 
   성북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는 나의 부탁에 나비다 님은 현재 거주하고 계시는 도전숙 인근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성북 도전숙은 스타트업 회사에게 주는 집인데 그중에서도 현재는 아이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부부동에서 살고 있다고. 그리고 옛 느낌가게 근처 길상사 가는 길을 걷는 것도 추천했다. 길상사는 옛날에 ‘요정’이었는데 그 특유의 묘한 옛 느낌이 있다고. 그리고 그 근처의 가게들만의 느낌들이 있다고.
 
   추신
 
   성북동에 대해 소개해주실 때. 나비다 님의 목소리엔 오래 살았던 동네를 떠올리는 사람 특유의 아련함과 애정이 묻어있었다. 직접 살아본 사람만이 떠올릴 수 있는 구체적인 그 느낌과 감각들. 내가 마치 그 기억 속에 들어가 나비다 님과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이 산책을 하며 동네를 소개받는 그런 상상.
   인터뷰가 끝난 후 나는 성북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저물녘이 되어 반은 어둡고, 반은 환한 시간. 오르막길을 따라 걸으며 길상사를 향해 걸었다. 왼편에는 불이 들어온 한양도성이 보였고, 오른편에는 사람들이 모인 왁자지껄한 가게들. 올라갈수록 어쩐지 공기가 선선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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