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전] 우이신설 스토리 문학 - 이상우 작가 7~9
이상우
2018.07.01~2018.09.30

우이신설 스토리 - 문학

 
작가가 직접 시민을 만나고 대화하며 인근 지역 이야기를 수집해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 냅니다.
시민 개개인의 삶과 우이신설선이 만나 문학 작품화되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예술을 경험합니다.

이상우 작가


시를 통해 쓸 수 있는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
다만 쓸 수 있는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시란 마음을 하나의 형태로 빚고 있는 것,
다 빚어내는 것이 아닌 다만 꾸준히 빚고만 있는 것.
소원이자 기도인 시를 오래도록 쓰고 싶은 사람이다.



한옥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쭉 들어가면, 백 년 된 한옥의 기타교실

 
“‘정릉기타교실’ 손대용 – 태어났고, 유년을 보낸, 백 년이 넘은 한옥의 기타교실”
 
<우이신설 도큐먼트> 노기훈 작가 사진 - 손대용

 

   “나고 자란, 할머님, 어머님, 아버님을 모두 보낸 집에서.”
 
   정릉시장의 한쪽 골목을 들어가면 손대용 선생님의 기타교실이 있다. 텃밭이 있는 집 한옥의 문턱을 넘어서면 바로 정릉기타교실이 나온다. 처음 문턱을 넘자마자 한옥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나는 매료되었다. 애정과 기품이 함께 묻어있는, 거주하는 사람의 정성이 느껴지는 집. 한옥이 정말 멋있다는 얘기를 손대용 선생님께 건네자 선생님은 이 집이 백 년이 넘는 집이라고 웃으시며 말했다. 본인이 태어났고, 유년을 보냈으며, 이곳에서 할머님, 어머님, 아버님을 잘 보내드렸다고.
   정릉에서 태어나 육십 년을 넘게 이곳에 거주하셨다는 손대용 선생님. 본래 이곳이 손 씨의 집성촌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원래 정릉은 손 씨와 왕 씨가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고. 손대용 선생님도 기타교실이 위치한 바로 이 한옥에서 할머니 때부터 계속 사셨다는 말을 해주셨다. 서울숭덕초등학교 21회 졸업생이시라고. 서울숭덕초등학교가 1945년에 개교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내가 남의 동네에서 무엇을 하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작곡을 시작하셨고. 1975년 CBS ‘우리들’이라는 프로를 통해 가수 혜은이 님과 함께 데뷔하셨다는 손대용 선생님. 이후 광진구에서 기타를 가르치다가 문득 ‘내가 남의 동네에서 무엇을 하나’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그 생각 끝에 10년 전 처음 정릉3동에서 기타교실이 시작되었다고. 정릉3동, 정릉4동, 정릉1동을 거쳐 마침내 이곳 한옥에서 기타교실을 꾸준히 이어가고 계신다고 말하셨다. 기타교실의 수강생들은 꾸준히 함께 공연도 하고, 이따금 대회도 참가를 한다고. 20개 동에서 3등을 차지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금메달마트 밑에 원래 정릉시장이 있었어요.”
 
   정릉에 오래 거주한 토박이답게 선생님은 본인만이 알고 계시는 정릉시장에 대한 말을 해주셨다. 현재 정릉시장 금메달마트 밑에 지하가 있었고, 그 지하가 바로 정릉시장이었다고. 그때 선생님의 어머님께서 건어물 가게를 하셔서 식사를 갖다 드렸던 기억이 있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아버님에 대한 얘기도 이어졌다. 원래 성북이 다 돌산이었는데 아버님께서는 석수를 하셨다고. 깨기 어려운 돌이 있으면 항상 찾았던 유능한 석수였다는 말씀도.
 
   “ ‘내 고향 정릉’ ‘북한산 둘레길’ 고향에 대한 노래가 없다.”
 
   인터뷰한 그 날. 선생님은 같이 수업을 하시는 수강생들과 함께 즉석에서 ‘내 고향 정릉’ ‘북한산 둘레길’이라는 노래를 들려주셨다. ‘고향에 대한 노래가 없다’는 생각에 작곡하신 노래들이라고. 흥겨운 멜로디의 노래. 그러나 어쩐지 ‘내 고향 정릉’을 들을 때는 그 정겹고 경쾌한 멜로디에 비해 왠지 모를 ‘슬픔’ 같은 것이 내게는 느껴졌다. 그 말을 선생님께 드리니 이제는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노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하다는 답을 해주셨다. 옛날에는 정릉천에서 가재가 뛰놀고, 서울숭덕초등학교 앞도 모두 개울이었다고. 정릉천에서 미역도 감고, 목욕도 하고, 그 물을 그냥 마시기도 했는데 지금은 송사리나 겨우 볼 수 있는 그런 물이 됐다며 아쉬워하셨다. 그러면서 하천에 나무가 더 많이 심어져서 옛날처럼 가재도 다니고, 오물도 버리지 않아서, 깨끗한 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그런 물도 돌아가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여 해주셨다.
 
   추신
 
   인터뷰 말미에 근처 볼만한 곳이나 들를만한 곳에 대해 여쭤보았다. 선생님과 수강생들은 정릉천을 따라 쭉 가면 새로 생긴 카페나 오래된 고목들이 많다는 말을 해주셨다. 선생님과 간단한 점심 식사 후 헤어진 뒤 나는 혼자 정릉천을 따라 내려와 천천히 걸어보았다. 과연 올라가다 보니 크고 오래된 고목과 그 아래에 평상에 동네 주민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북한산보국문역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도. 나는 선생님께서 말해주셨던 옛날의 정릉천을 떠올려보면서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일 년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물. 그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이의 장소들 8. ‘동북권역마을배움터’ 언덕길을 올라가 골목 왼쪽을 쳐다보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공간 속을 걸어갔다.
 

“‘품 청소년문화공동체’ 강명숙 – 배움 앞에서는 모두가 아이.
어디에서나 배울 수 있고, 서로 배워야 하는 것.”

<우이신설 도큐먼트> 노기훈 작가 사진 - 강명숙

 

   ‘92년 품의 첫 시작, 왜 행복하냐. 어떤 의미냐 묻는 어른이 없어서’
 
   1992년 품 청소년문화공동체(이하 품)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님이 어린 시절 음악을 했었다고. 그때 음악을 통해 자기 나름의 세계가 넓어지는 걸 느끼고 행복감을 느꼈는데 주변엔 먹고 살기 힘드니 그만두라는 어른들이 많았다고 한다. 훗날 대표님이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음악을 했을 때 왜 행복하냐, 그것이 어떤 의미냐 묻는 어른이 없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고.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청년 세 명의 의기투합으로 처음 품이 시작되었다. 강명숙 사무국장님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렇게 시작된 품의 청소년 캠프에서 처음 품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아주 참신하거나, 그럴싸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철학’
 
   중학교 2학년 때 출발된 인연은 2002년 품에 입사하는 것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고 한다. 어릴 때 강명숙 사무국장님은 품을 이끄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저렇게 사는 것도 즐거워 보였다는 생각을 했다고. 특히 아주 참신하거나, 그럴싸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철학 속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정신적인 성장을 느꼈던 것이 품의 매력이었다고 설명했다. 90년대 당시 품은 역사, 우리나라만의 정신, 우리만의 놀이문화에 대한 고민을 통해 자연이라는 키워드로 삶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한다. 처음 삶의 뿌리가 강에서 온다는 생각으로 실제로 청소년들이 강을 찾아갔고, 그러한 강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 끝에 강은 산에서 온다는 생각으로 산에 직접 찾아갔다고. 또한 마지막엔 이 물은 결국 바다에 간다는 결론으로 바다에 갔다고. 8박 9일 동안 작은 소모임으로 이루어진 각 모둠이 저마다 각지의 자연을 탐험하며 작은 여행들을 만들어냈고, 나중에는 모든 구성원이 만나 각자의 여행 경험을 공유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새로운 키워드 ‘지역’ 궁극적으로 아이들의 세상이 변화하지 않았기에’
 
   그러나 이 여행에서 또 다른 질문을 얻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만나서 하는 활동들은 너무 좋지만,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아이들의 세상이 변화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품은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강북에 정착했다고 한다. 동네 아이들을 만나게 됐고, 열악한 청소년의 삶을 바꾸기 위해 축제를 시작했다고. 축제를 통해 아이들을 어떻게 건드릴 것인가. 이 시대상에 맞는 청소년 축제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고민 끝에 축제 속에 실제 청소년 스스로의 목소리를 청소년들이 담는 것이란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추락’(가을 추에 즐길 락. 중의적인 의미)은 20년째 지속되었고, 청소년축제기획단이 스스로 축제를 기획하는 과정을 만들어냈다 한다. 축제를 통해 아이들이 자신이 일방적인 교육이나 훈육의 대상이 아닌, 스스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구성원임을 알게 되는 축제.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아이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고, 아이들이 아이들의 욕구를 발견하는, 구조와 과정이 있는 축제.
 
   ‘배움은 어디에서나 가능하고, 서로 배워야 하는 것. 동네의 선생님을 찾아가다’
 
   강명숙 사무국장님은 축제가 계속되면서 두 가지의 질문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나, 축제는 그래도 하루면 끝난다. 다른 모든 일상이 축제일 수 없을까. 둘, 기존에 쌓아놓은 축제에 대한 기대와 역량이 있고 아이들의 환경이 변화하면서 여러 불안감이 극대화되었다. 과연 축제가 아이들을 정말 행복하게 하는가. 이때 바로 ‘지역’이라는 키워드를 잡고 ‘마을마실’이란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이 동네주민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자격이 있는 어떤 선생님들이 아니라 동네 단골 식당의 사장님. 지역에 사는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아주 ‘특별한 선생님’을 찾아가게 됐다고. 배움은 어디에서나 가능하고, 서로 배워야 하는 것. 그 선생님들은 같은 강북에 사는 주민이기에 한 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고. 강명숙 사무국장님은 2000년대를 사는 아이들의 지역성은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단순히 어느 동네에 살고,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고 같은 것이 아닌 어디서 무엇을 하든 스스로가 사는 그곳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얘기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아이들의 지역성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마을마실’은 그것을 체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고. 마을은 세상과 세상의 시스템이 담긴 소우주고. 그 마을을 통해 배움으로 아이들 스스로가 사회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중요한 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동북권역마을배움터의 탄생,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도와주고 제안하는 공간’
 
   이후 강북에 동북권역마을배움터가 탄생하고, 품은 그것을 민간 위탁 운영을 맡게 되는 또 다른 변화를 맞이했다. ‘단체나, 어떤 인증된 특수한 사람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의 배움’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서울시 조례 개정에 참여해 마을배움터라는 명칭을 제안했고, 이후 공개입찰 참여 과정을 거쳐 동북권역마을배움터의 운영을 함께 하게 됐다고. 서울에서 유일하게 청소년문화의집이 존재하지 않는 강북구에 청소년을 위한 공공 문화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품은 마을 주민, 예술가, 청년, 10대들을 모아 같이 토론해 나갔다고 한다. 강명숙 사무국장님 ‘너희 일상이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도와주고, 제안하는 공간’으로서의 마을배움터에 대한 의견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계속 부딪히는, 마주치는, 만남이 유발되는,
   이 공간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것을 토대로 세상에서 무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현재 공사를 진행 중인 동북권역마을배움터는 북한산우이역 인근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강명숙 사무국장님은 도대체 이 공간을 지은 목적이 뭐야? 라고 질문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효율과 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문화적 상상이 가능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이를테면 두 개의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가 자리 잡고 있는데 ‘혼자 지나가기엔 넓고, 둘이 지나가기엔 좁은’ 다리라고 했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부딪히고, 마주치고, 만남이 유발되는 장소. 1층에는 카페가 있어 청소년들이 대학이나 사회로 밀려나기 전 자기 삶을 실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되고, 2층은 다목적실이 하나 생기고 반대로 무목적실인 온돌방이 생길 것이라고. 강명숙 사무국장님은 이 공간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마을배움터가 하나의 아지트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마을배움터는 지원을 맡는 아지트고 이곳을 토대로 강북, 성북, 도봉 더 나아가 세상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이지만 여러 다른 세대를 아우르는 곳. 그 아우름을 통해 배움이 무엇이고, 지역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더 나아가 마을을 관통하는 여러 네트워크. ‘배움의 생태계’를 만드는 곳. 마을 배움의 사례를 실험하는 곳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것을 통해 청소년이 자신이 사회적 존재인 민주 시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마을과 자신 삶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추신
 
   북한산우이역. 언덕길을 올라가서, 골목을 따라 문득 왼쪽을 쳐다보면. 나는 두둥실 떠올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구름다리를 걸어 나갔다. 멀리서 보면 정면에서 오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나무를 쳐다보고 있다. 마치 어떤 공간이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일층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커피향에 둘러싸여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다목적실에서는 분주하게 어떤 연습이 이루어지고. 무목적실인 온돌방에는 널브러져 자는 몇 명의 아이들이 보인다.
   나는 다시 인터뷰 장소인 품의 사무실로 돌아와 있다. 강명숙 사무국장님은 동북권역마을배움터의 CI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CI에는 한 그루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는 아이 그 밑의 그늘에서 졸고 있는 아이가 그려져 있다. 배움 앞에서는 모두가 아이고, 스스로 성장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이 되는 모습이라고. 그리고 나무는 마을배움터가 동북권역에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과 나무들이 모여 숲이라는 협력을 이루듯, 그들이 가진 협력의 모습을 담아놓은 것이라고.
   그 순간 나는 정희성 시인의 숲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제가끔 서 있더군/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숲이었어//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낯선 그대와 만날 때/그대와 나는 왜/숲이 아닌가’



우이의 장소들 9. ‘청수도서관’ 정릉의 골목과 골목 사이를 거닐다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


“마당이 있고, 나무와 꽃이 있는 도서관. 책과 정원을 느끼고 싶다면, - 청수도서관 장영철 관장”

   ‘본래 젊은 예술가들이 꿈을 키우던 집, 청수도서관’
 
   정릉의 골목 한가운데 청수도서관은 위치해있다. 장영철 관장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갔을 때, 작지만 정성껏 가꾼 마당에서 키 큰 나무가 나를 반겨주었다.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청수도서관. 관장님의 말에 따르면 청수도서관 건물은 전에는 배우들이 숙식을 하며 꿈을 키우던 집이었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나아갔던 곳에, 이제는 책과 정원이 자리 잡고 아이들과 동네 주민들이 오간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정릉에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는 도서관이고, 사람들의 생활권에 가장 밀접하게 들어와 있다는 얘기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이웃, 그리고 이후의 후일담’
 
   도서관에서 처음 일하시며 겪었던 인상적인 기억에 대해 물어보았다. 관장님은 특별한 주민 한 분에 대한 얘기해주셨다. 처음 도서관이 개관할 때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옆집에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고민 끝에 관장님이 직접 찾아뵈자 이 이웃은 생각 외로 너무 반겨주시고 이후엔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 이웃은 민화와 서예를 하시는 분인데 본인의 작품을 도서관에 전시하라 주시기도 했다고. 관장님은 말했다. 도서관이 지역에 필요한 시설이지만 누구에겐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로 놔두는 게 아니라 서로 접근하고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 친한 이웃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경험이었다고. 또 이후의 후일담을 들려주셨다. 지금은 이 이웃이 집을 구청에 매각했고 이제 그곳이 공원이 되어 도서관이랑 합쳐질 것이라고. 도서관과 공원이 어울릴 수 있는 여러 활동을 계획 중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지역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도서관’
 
   청수도서관이 운영하는 특별한 프로그램 같은 것에 대해 물어보니 ‘정릉 청소년 저널리스트’라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작년부터 지역의 청소년들과 함께 카드 뉴스 등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전시를 하고, 아이들끼리 교류를 하는 그런 활동을 하고 있다고. 정릉 지역 안에서 아이들만의 활동이나 프로그램이 많지 않아 다른 번화가로 계속 빠져나가는데 지역에서 활동했으면 하는 마음에 시작한 활동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길 위의 인문학’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문인이 사랑한 서재, 정릉동’이라는 강좌를 열었다고. 일방적으로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릉 일대를 실제로 탐방하였다고 한다. 9월 말부터는 ‘정릉의 지식인 네트워크’라는 주제로 강좌가 진행된다고 한다. 독립 운동가였고, 글을 썼으며, 지식인이었던 작가들에 대해 3차 강의가 진행 될 예정이라고. 또한 ‘정릉 서재’라는 이름으로 스터디도 하고 있는데 10월 말엔 그 자료집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관장님은 지역의 색깔을 찾고, 그 지역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여러 활동을 도서관을 통해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네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원래 이곳이 고향이 아닌 주민이더라도 정릉을 알게 되고, 정릉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여러 활동들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마당이 있고, 정원이 있는 청수도서관’
 
   청수도서관 인근에 들를 만한 곳에 대해 물어보니 우선 청수도서관을 꼭 들러보며 좋을 것 같다고 관장님은 웃으며 말하셨다. 성북에 여러 도서관이 있지만 그중에서 마당이 있고 정원이 있는 것은 청수도서관밖에 없다고. 장영철 관장님은 책과 정원을 더불어 느끼고 싶다면 청수도서관을 들러보면 좋을 것 같다고. 또한 인근에 정릉천이 아리랑 시장부터 청수장까지 정비가 잘 되어 있고. 또 천을 따라 쭉 올라가다보면 옛날 청수장 건물이었던 북한산 관리공단 탐방 사무소도 있다고. 청수장을 가기 전엔 박경리 소설가가 살았던 집도 있는데 그곳에서 처음 토지가 집필되기 시작됐다고. 또한 인근이 아니더라도 우이동의 우이천도 무척 좋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생각해보면 우이신설선은 성북천, 우이천, 정릉천이라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천 3개를 끼고 다니는 철도라고.
 
   ‘인문학적으로, 지리적으로 아름답고, 사색과 생각이 깊은 정릉’
 
   장영철 관장님은 정릉이 인문학적으로, 지리적으로 아름답고, 사색과 생각이 깊은 곳이라고 말했다. 과거 박경리 선생님의 생가가 있기도 했지만, 그 외의 2, 3세대 여성 작가들도 거주했던 지역이며, 지금도 여러 문인들이 사랑하는 곳이라고. 정릉이 문화적으로 활기차고, 사람들이 많아져 더욱 활성화되는 그런 곳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추신
 
   인터뷰를 마친 뒤 옥상에 올라가 청수도서관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몇 개의 벤치 그리고 크고 작은 나무들. 골목과 골목 사이에 도서관이 어울리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 그 가운데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공원이 될 예정인 옆집에 대해 상상하며.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몇 명의 사람들과 그 앞을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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